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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마하리시 : 참나(the Self)를 찾는 수행방법
박승주 바른마음의인운동 상임대표(세종로국정포럼 이  |  sjparkciv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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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13  17: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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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주 바른마음의인운동 상임대표(세종로국정포럼  이사장)

<마하리시 위상과 평가>
심리학자 칼융 = 마하리시의 삶과 가르침은 서양인에게도 중요하다
라즈니시 = 완벽한 성인이다
많은 인도 구도자들 = 시바신의 顯現이다.

<사람들의 질문들>
-결혼은 영적인 진화에 방해가 되나요?
-깨달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나요?
-바쁘게 세상일을 하면서도 삼매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나요?
-육식을 하면서도 영적으로 진보할 수 있나요?
-선행을 하면 깨달음에 도움이 되나요?
-신과 직접 대화하는 일이 저희들에게도 가능한가요?

-텔레파시 같은 능력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명상 중에 모기가 물어도 그냥 해야 하나요?
-세상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 세상이 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환생이 있나요?
-이 세상에 슬픔과 죄악이 가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마하리시 깨달음의 배경과 내용>
16세에 죽음을 체험 – 느닷없이 육체에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지면서 사후강직 일어난 것처럼 몸이 뻣뻣해 졌다. 마음에서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
“이제 나는 죽는구나. 죽는다는 것은 육체가 죽는 것이기에 화장터에 실려 가서 재로 변할 것이다. 육체가 죽고 타서 없어지면 ‘나’(the Self)도 죽은 것인가? 내가 곧 육체인가?”

몸이 죽은 것처럼 강직되어 있는 순간에, 육체가 아닌 ‘나’가 있음을 발견했고, 육체가 죽더라도 변하지 않고 또 결코 죽지도 않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순간 사라지고, 깨달음의 빛을 얻었다.
“나는 없어질 육체가 아니다. 나는 존재하는 실체이다. 나는 누구인가?”

“개별적으로 분리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체적인 자아가 없다”
“참된 본성은 형태가 없으며, 만물에 두루 편재하는 의식이다. 삼라만상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경험되며, 우주라는 형태로 顯現한다”
“참된 본성은 (몸이 죽더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무한한 순수의식이며, 육체, 마음, 개체성과는 관계가 없다”

<마하리시의 가르침>
마하리시가 말하는 깨달음(awareness) = 어떤 것을 대상적으로 알거나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그대로의 나(眞我)가 드러나는 것 (Be as you are)

깨달음은 얻어야 할 지식이 아니고, 자신의 무지한 견해를 내려놓는 것
(예) 배탄 바보10명 : 존재하지 않는 무지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2원론적인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깨달음에서 얻은 ‘의식만이 유일한 실체’이다. 스스로를 한계 짓고 제한하는 생각이 진리에 때한 깨달음을 막기 때문에 이 생각을 버린다면 의식의 실체가 드러난다.
스스로를 한계 짓는 마음의 습관을 멈출 때 ‘나’를 알아차릴 수 있다.

내면의 깨달음은 자연스레 ‘영적인 빛’으로 뿜어져 나온다.
깨달은 사람은 (사람이나 일이나 사물이 제각기 모두 다른데도) 세상만물이 겉모습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만물을 차별 없이 보며 모든 게 하나라고 생각한다.

깨달은 사람은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을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대한다
깨달은 사람은 나라는 개체의식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 개체적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사라지면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깨끗하고 순수하며 고정된 틀이 없고, 미묘한 지혜로움 안에서 작용한다. 이런 마음 때문에 그의 욕망은 순수하다.

<거짓 나>
개체로서의 나는 본질적으로 존재 않으며, 마음이 빚어낸 허상이고, 참나의 진실한 체험을 방해하는 것이다.

무지가 나(진아)를 가리고 다른 것을 투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릇되게 투사된 것을 자신의 참된 자아라고 착각한다.

컴컴한 헛간에서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하여 움찔하는 것과 같다. 무지가 만들어 낸 현상이다.
무지를 제거하면 ‘나’를 발견한다. ‘나’를 발견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헛간에 불을 켜는 순간 어둠이 걷히면서, 착각으로 생긴 뱀은 일순간에 사라진다.

대표적인 무지(그릇된 관념)는 나(진아)를 신체, 감관, 마음작용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무지를 없애고 그릇된 관념을 멈추기 위해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거짓 나를 참나와 동일시하고 집착하게 되면 좌절, 실망, 비애를 겪는다.

<참나> - ‘나’(the Self)
모든 개체적 자아와 삼라만상에 영원불변의 실체인 ‘나’가 깃들어 있다.
나(眞我)는 그것을 가리고 있는 내면의 ‘그릇된 관념’을 던져버리면 저절로 드러나는 빛이다
‘나’는 도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원래부터 있다. 항상 ‘나’인데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존재하고 실체가 있으며 초월상태이다. 언제나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새롭게 나타나지도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실체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나’가 아닌 적이 없었는데도 언젠가는 ‘나’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서 목걸이 찾느라고 서랍 뒤지는 것과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나(眞我)는 인간의 의식에서는 無와 같은 그 무엇이다

나(진아)는 결코 無가 아니며, 존재의 충만이고 순수의식이며 희열이다. 영화관의 스크린 : 무수한 영상이 실제처럼 비춰진다. 그렇다고 스크린이 물에 젖거나 불에 타거나 손상당하는 일은 없다. 어떤 장면이 비춰지던 스크린 자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사람의 경우 : 깨어 있을 때, 꿈을 꿀 때,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어느 때든 일어나는 상황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기에, 괴로움이나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언제나 ‘나’로서 존재한다. 깨어있는 상태가 길고 삶이다보니 그 상태를 자신의 진면목인줄 착각한다.

꿈속에서 인생 80년을 잘 살고 깜짝 놀랄 일로 깨어나니 한나절 지났더라는 남가일몽, 원래부터 방안에 있었다. 꿈꾸거나 깨어있거나 모두가 ‘존재’하지 않기에 다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깨어 있을 때는 육체가 있지만, 깊이 잠들면 육체가 없다. 의식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잠들어 있을 때는 한계가 없지만 깨어 있을 때는 한계가 생긴다. 이 한계가 속박이다.

<마음>
‘나’는 마음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마음은 ‘나’가 없으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마음은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은 가슴에서 나오는 순수의식의 빛이 투영된 것이다. 마음의 습성이 의식의 빛을 굴절시켜 투영한다.
마음은 가슴에서 나오는 무한하고 차별 없는 의식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애물이다.

‘나’에 머무르면 마음이 나를 어쩌지 못한다. 마음이라는 독립된 실체가 없고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만을 보는데, 마음은 온갖 허상을 만들어 낸다. 마음이 내부로 향하면 ‘나’에게 접근하고, 외부로 향하면 ego에 접근 한다

‘나라는 생각’이 ego다. ego는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사람들은 ego를 나로 착각한다. ego를 없애면 무지도 사라진다. 생각으로 습, 관념, ego(마음)를 없애려고 해봐야 소용없다. 마음으로 마음을 없앨 수 없다. 마음이 사라지면 세속적인 견해들도 다 사라진다. 본연의 상태가 저절로 드러난다.

마음의 습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면 의심과 혼란이 계속 일어나 진리를 듣고도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진리를 경청하여 이해하고, 내면을 성찰하는 수행과 명상을 하여 마음의 습을 없애야 한다. 물결이 흔들리지 않으면 물은 보이지 않고 수면위에 반짝이는 별빛만 보인다. ego에게 놀아나지 않으면 자연히 그 배후의 빛만 바라보게 된다.

<가슴>
보통사람(속박된 사람)은 머리로 살아가고, 외부에 있는 대상만을 본다. 세상과 진리와 분리되어 있다. 깨달은 사람(해탈한 사람, 자유로운 사람)은 가슴으로 산다. ‘나’가 가슴에 있기 때문이다.

가슴은 ‘나’의 중심이다. 깨닫고 나면 중심이 어디인지 저절로 느끼게 된다. 가슴의 위치가 신체의 어느 부위인지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가슴을 체험하려고 애써야 한다. 가슴 자체가 ‘나’다. 깨달음이 가슴이다.

<현상계를 보는 시각>
깨달은 사람은 현상계를 볼 때 보이는 것의 바탕을 이루는 ‘나’를 본다
보통사람 = 현상계를 볼 때든 안 볼 때든 진면목인 ‘나’에 대해 모른다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 : 스크린 밖에 없다
영화가 상영되면 : 온갖 전투와 장면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가가 잡으려면 스크린만 잡힌다.
영상이 끝나면 : 텅빈 스크린만 남는다.

‘나’도 홀로 존재한다. 현상계라는 실제 하지 않는 영상들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현상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깨달은 사람은 스크린(보는 자)과 그 위에 나타나는 영상(보이는 대상) 두 가지 모두가 ‘나’임을 안다. ‘나’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상관 않는다. 잠자는 동안에 꿈을 꾸지만,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바로 안다. 깨어있는 상태 역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안다.

깨달은 사람의 의식은
➀영원한 나에 대해 깨어 있기 때문에 늘 깨어 있는 상태이면서 동시에
➁현상계란 늘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꿈과 같은 현상에 불과하기에 늘 꿈꾸는 상태이며 ➂육체가 나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깊이 잠든 상태이기도 하다.

<육체에 대한 시각>
깨닫지 못한 사람 : 참나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만을 ‘나’라고 생각한다. 고통 못 참는다. 육체가 하는 행위를 자기가 하는 행위로 생각한다.

깨달은 사람 : 모든 것이 ‘나’이기에 고통이 있어도 내버려 둔다. 고통도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행위도 행위 하는 자도 없다. 라디오가 말도하고 노래도 하지만 속에는 어떠한 행위자도 없듯이, 깨달은 사람도 말은 하지만 육체 속에는 행위자가 없다. 참나만 있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써야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마음이 없이도 활동하며 살아간다.

깨달은 사람은 육체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자신과 행위를 동일시하지 않기에 자신을 행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행위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힘이 그의 육체에 작용해 그의 육체를 통해 일이 이뤄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해탈>
해탈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고 싶다는 뜻인데, 속박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해탈이란 없다. 무지만 없애면 자유롭게 된다.

해탈이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무지를 떨쳐내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자유를 얻는 해탈에 대해 묻기 전에 먼저 속박이 존재하는지부터 살펴보라. 나는 누구인지를 보라.

[자기탐구 방법] : 부정을 통하여 ‘나’를 찾는 수행방법
<자기탐구 질문>
-나는 누구인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 후각, 청각, 미삭, 촉각 5감기관은 내가 아니다
-입,손,발,항문,생식의 5행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 등 5생기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나는 누구이지?
-지켜보는 목격자, 그가 발 나다. 眞我이다.
<자기탐구의 목적과 출발점>
마음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여 깨닫기 위한 것이다
생각의 전제로서 = ‘나’는 존재한다(I exist)는 강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나 자신이 이미 깨달은 존재인데, 왜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않고 다른데서 깨달음을 구하느냐? 이것이 자기탐구의 출발점이다.

<자기탐구과정>
내가 아닌 것을 한 겹씩 털어냄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나(진아)를 드러내는 수행법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진언 염송하듯이 반복해 되뇌면서 묻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모든 생각의 뿌리인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밖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기 때문에 의식을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모든 생각의 배후에는 ‘나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나는 누구인가?를 하다보면 ‘나라는 생각’이 실체가 아닌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나라는 생각’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그게 무엇인지 알아낼 때까지 질문하여 근원을 끝까지 파헤쳐야 한다

-다른 생각들이 밀려들어 오더라도 ‘나라는 생각’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그 한 생각에만 집중하다보면 다른 생각들은 저절로 사라진다
‘나’가 만드는 끊임없는 마음인 ‘나라는 생각’은 실재하지 않는 망상이다.
‘나라는 생각’은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고,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나라는 생각’이 따라서 일어나 ‘나는 생각한다. 나는 믿는다. 나는 원한다. 나는 행한다’ 식으로 주인행세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탐구 중에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 생각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 누구에게서 일어났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라도 일어날 때 마다 놓치지 말고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물어야 한다. 답은 ‘나에게’이다

‘나’를 깨달아 개체성이 사라지면 마음도 따라 사라지며, ‘나라는 생각’도 함께 사라진다.
-‘나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찾아보라
-나를 알아차리는 데서 그치지 말고 ‘나’가 되어야 한다

<자기탐구관련 그릇된 견해>
➀아드바이타(不二1원론) 베난타학파(1000년간)
‘나’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마음으로 확언하는 명상수행 권유
‘나는 브라만이다’는 확언을 진언으로 삼아 반복 되뇌면서 긍정수행
*‘나는 브라만이다’라며 반복해서 되뇌는 식의 명상은, 마음으로 하는 생각일 뿐이다.
*브라만 = 우주 근본원리이자 유일한 실체, 창조주이며 동시에 나 자신

➁네티 네티수행(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부정수행
생각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나’가 아닌 것으로 여기고, 이를 마음에서 떨쳐내야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수행법
‘나’가 동일시하는 모든 대상을 말로 부정
‘나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나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로 체험할 수 있다는 가정
이 수행법은 지적행위에 불과하여 결코 마음을 넘어설 수 없다

➀➁수행법의 공통전제 =마음으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
-마음을 일으켜 나에 이를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그 뿌리
-一切唯心造?
*마음으로 마음을 없앨 수 없다!

➂가슴중심(가슴차크라)에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는 믿음파
특정 신체부위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사트상가] - 스승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한 상태(존재와 하나됨)
나를 깨달은 사람의 물질적 육신 곁에 머무르는 것
스승에게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힘 : 스승과 물리적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받을 수 있다.
스승과의 정신적 연결이 가장 중요 요소. 스승의 육신 곁에 뿐만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스승을 생각하기만 해도 이뤄진다.

침묵은 그칠줄 모르는 언어이며, 침묵을 통한 설법은 완전한 가르침이다.
침묵의 힘은 그 에너지에 공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든다.
말로는 ‘진리를 언급’만 하지만, 침묵으로는 ‘진리 자체’를 전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해 철학적인 용어 나열하며 탐구할 필요가 없다. 걸음 걸을 때 한 발 올린 후 다른 발을 언제 올릴지 생각하지 않고 걷듯이.

<사트상가의 힘>
-사트상가를 나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라
-깨달은 스승과의 하나됨을 통해 가슴에서 지고의 상태가 일어난다

-스승의 존재와 하나가 된다면 모든 계율이 필요 없다. 동남풍 부는데 무슨 부채가 필요 있으랴
-깨달은 스승을 친견하기만 해도 죄를 없애준다
-깨달은 스승이 보내는 한번의 시선만으로도 마음이 순수해진다. 위대한 영혼의 정화력이다.

<침묵의 힘이 강력한 이유>
깨달은 사람은 정신적 영향력을 지닌 파동을 발산하여 많은 사람을 끌어당긴다. 동굴 속에 앉아 침묵을 지키면서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깨달은 사람은 굳이 군중 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침묵은 가장 강력하고 고차원적이며 최상의 전수의식이다.

신. 은총. 스승은 같은 의미이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영원히 존재한다
스승의 힘은 사납게 날뛰는 ego라는 코끼리를 정복하게 한다
스승은 육체적 형상이 아니다. 정신적 접촉이기에 스승 사후에도 계속된다

위대한 성인이 눈길 한번만 주어도 정화하는 효과가 있다. 지혜의 불은 모든 業을 태워버리는데, 지혜는 깨달은 이와 교류함으로써 깨달은 이가 발산하는 정신적 아우라로 성취할 수 있다.
깨달은 스승을 시봉하면 은총을 받는다. 깨달은 현자를 지속적으로 접하면 차츰 무지가 사라져 언젠가는 완전히 제거되고, 영원한 ‘나’가 드러난다.

[마하리시 자기탐구 수행방법문제점]
‘마음으로 마음을 없앨 수 없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아드바이타수행법(‘내가 브라만이다’ 참선방법)과 네티네티수행법(無자화두수행법)을 문제있는 수행법으로 본 것은 인도전통방식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마하리시는 인도철학에서의 ‘브라만’이 삼라만상에 형상만 바꾸어 존재하는 ‘참나’라 생각하여, 개체별로 갖고 있는 본성으로서의 영혼(정신혼)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최고의 브라만인 참나를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영혼이 탈바꿈하는 해탈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만물의 동일한 본질로서의 참나이론으로는 인간을 바르고 선량하게 만들기가 곤란하다.
나는 누구인가? 부정하는 방법만 갖고 그 참나도 찾아가기가 매우 어렵다.

안소정스승님의 하늘빛관정명상을 통한 자아찾기 방식이 보태진다면
마하리시 자기탐구 수행방식은 크게 빛 볼 수가 있다.
안소정 방식 = 자아찾기 (self serching 방식)
마하리시 방식 = 자기탐구 (self enquiry 방식)

인도 스리 라마나 마하리시(Sri Ramana Mahahrishi)의 참나(the Self)를 찾는 수행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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